<보이지 않는 풍경> 에 부쳐


글. 김인선 (윌링앤딜링 대표)

 

 

2013년 3월 21일 신한 갤러리에서 첫 전시를 가지게 된 두 명의 작가 김혜나와 노경화는 회화를 전공하고 있는 대학원생이다. 그들의 작업실은 아직 학교 내에 있었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러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학생 티가 완연하였고 곧 학교를 떠나서 작가로서의 타이틀을 들고 외부 관객들에게 작품을 보여주어야 하는 긴장감과 부담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전시를 앞둔 그들을 대하는 것 자체가 기존에 만나왔던 작가들을 대하는 느낌과 남달랐던 것도 사실이다. 이들의 작품을 읽어내기에 앞서 미술계라는 좁은 문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또 다시 나눠진 다양한 작품 성향과 세분화된 시스템을 마주하고 끊임없이 선택하고 선택 당할 이들의 앞날에 우선은 열렬한 응원을 보내주고 싶다. 
이들은 둘 다 풍경을 소재로 하고 있었다. 요즘처럼 디지털 카메라가 흔한 시대에 풍경을 다룬다는 것은 회화 작가들에게 어떠한 의미일까.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풍경을 화폭에 담는 행위를 넘어서 작가로서의 특이성을 찾아야 하는 것이 또한 현대 미술 작가들의 고민이자 작업 의미를 찾는 과정일 터이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회화를 관람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착시를 갈구하는 행위는 아닐 것이다. 관객은 예술을 매개로 하여 새로운 감성에 의해 자극받기를 원하고, 다른 이들의 경험을 자신의 삶에 대입해보고 공통점을 발견하거나 다른 점을 찾는다. 그런 의미에서 신한 갤러리에서 개최되는 김혜나, 노경화의 전시가 얼마만큼 관객과의 접점을 만들어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해 줄지 기대가 된다.  
 
김혜나의 작품 화면에서 눈에 띄는 것은 우선 화면의 구성이다. 작가의 의도인지 궁금해질 만큼 그려진 대상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창백한 여백이 많이 눈에 띈다. 작가의 눈은 언제나 구석 쪽으로 향해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여백이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상대적인 시각효과가 한 몫 하고 있다. 그는 도시 전체의 풍경보다는 그것을 이루는 아주 작은 부분을 열심히 들여다본다. 배경이 되고 있는 넓은 여백 부분은 그 좁은 시야가 외부로 확장 될 수 있는 역할의 여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빈 공간이기도 하고 배경 건물 등 넓은 면의 부분이기도 하다. 화면 속 풍경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크게 분할되는 화면의 구도와 함께 인물의 부재는 이미지의 삭막함을 극대화 한다. 그의 화면에서의  여백은 빛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가령 제목에 <A night>, <A night 2>, <pink snow> 등 색이나 빛에 관한 단어가 종종 들어가는데 이 제목의 그림들은 사물에 반사된 빛과 공기의 색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며 빛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그는 주로 특정 공간을 연상케 하는 구석 부분을 표현하고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 이런 화면 구성이 관객의 눈에 자연스러운 풍경처럼 보이는 것은 도시에 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눈에도 익숙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특히 공간감이 건물과 건물이 밀집된 도시에서는 가시거리가 짧고 보통은 바로 눈앞의 건물을 주로 보게 되는데 이러한 좁은 시야에 단련된 도시인들에게는 특히 익숙한 풍경인 것이다. 특정 공간의 구석이나 건물 사이, 혹은 눈앞의 벽. 우리가 항상 마주하는 풍경을 작가 특유의 기법과 색감으로 바라본다.  
김혜나는 원래 풍경의 일부분을 삭제하기도 한다. (<construction site> 2012) 자신이 생각하는 구성과 다르다면 과감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의 일부를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것은 공간 구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느낌에 대한 확신을 강하게 하는 사례이다. 화면의 분할을 조화롭게 맞추기 위한 이러한 본능적인 삭제 행위를 한다는 것은 미세한 시선으로 어떤 풍경의 일부분을 관찰하는 태도에서 있음직한 극사실적 표현으로 가기 쉬울법한 예상을 뒤집는다. 그는 중심이 되는 대상을 강조하기 위하여 시선에 방해되는 요소를 지워버려 대상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대상 자체의 물성을 표현한다기 보다는 대상의 느낌을 잡아내려 한다. 점차 붓자국이 커지고 속도감을 보여주며 묘사의 방식보다는 특정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감만을 살려두고자 하는 화면을 볼 수 있다. 물질의 촉감은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붓질의 행위가 점차 부각된다. 배경이 오히려 묘사되어 분명한 장소성을 드러내되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실재의 대상에서는 붓놀림의 행위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점차 그의 작품을 비구상 회화로, 급기야는 추상화로 이끌고 있는 듯 보인다. 형태에 집중하고자 삭제했던 배경의 일부처럼 풍경은 빠른 붓자국으로 채워지고 있다. 묘사의 흔적을 자제하고 있으며 실물의 질감을 공들여 그린 듯한 묘사적 느낌을 자제하고자 애쓰고 있다. 작가는 풍경의 모양새보다 그 본질에 대해 관찰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풍경을 구성하는 몇 가지 오브제들을 그렇게 보이게 만드는 더욱 본질적인 요소, 빛과 공기 등을 관찰하고 있다. 그가 행하는 붓질의 스피드를 통해 공기의 움직임은 바람이 되어 나무에 속도감을 준다. (<신작제목>, 2013) 
김혜나는 자신이 그리는 대상을 선택할 때는 자신의 주변에서 그의 시선에 닿는 풍경이라면 어느 것이나 소재가 된다고 말한다. 항상 보는 주변 풍경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 우리의 시선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작가도 주변을 바라본다. 그런데 그는 그 주변을 색다르게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특별하게 보이는 방법은 회화의 화면 속 이미지가 작가에게 이렇게 보이더라는 강한 메시지가 여운을 남길 때일 것이다. 작가는 흔하디흔한 풍경을 자신의 회화 특성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푼크툼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푼크툼은 간략히 말하자면 주관적인 이미지라 할 수 있겠다. 즉, 풍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눈에서 한번 걸러진 후 작가의 마음속에 남겨지는 여운의 풍경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장면을 보아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상대적 차이에 대한 것인데 김혜나는 관객들에게 ‘이 공간에서의 나의 푼크툼은 이런데 당신은?’이라고 묻는 듯하다. 

 

노경화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어릴 적 기억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화면에는 표현된 이미지들은 학생시절 또래 아이들에게서 겪은 공포와 불안감에 대한 회상들이다. 작가가 직접 겪은 따돌림의 경험은 작가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스며있고 이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고통일터인데, 그의 작업에서 자신의 그 힘겨운 기억을 재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직은 완전하지 않지만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의 회화에서 읽을 수 있다. 그의 작품의 변화를 보면 그가 재생한 기억은 다시 이를 지우기 위한 일종의 치유과정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이 제작된 시기를 순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작가 자신에 대한 기록적인 성격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노경화의 회화를 단순한 풍경화로 여기기에는 무리가 있다. 우선은 그의 작업은 바라보기 보다는 읽어내기를 시도해야 하는 것이다. 나쁜 기억들이 무의식으로 침잠해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괴롭힌 인물들과 괴롭힘을 당한 기억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상처로 남아 대인기피적인 성격이 형성되었다며, 노경화는 담담히 자신의 옛 일을 회상하면서 조리 있고 분명하게 자신의 작품의 어떤 부분이 이 옛 기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심리치료나 정신분석학에는 문외한이지만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단계적 치유 과정은 흥미롭다. 2011년도의 작업들에는 상징적인 도상들이 자주 등장하면서 나레이션을 강하게 반복한다. <모호하고 이중적인 공간-멈춤>에서는 교실 속에서 불안함을 느끼던 모습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는 데, 등장인물은 주변을 돌아보고 있는 듯하면서 눈을 감고 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평범한 교실은 점점 균열이 일어나고 있으며 색채는 어둡고 창백하다. 이 이미지만으로는 작가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겠지만 작가는 교실풍경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작가 자신을 등장시켰다. <완전한 기분>, <자학하며 자위하기>, <나는 끝내 말할 수 없었다>등의 작업에서도 불안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2012년 작품이며 그가 회상하는 기억 속에 존재하는 아이들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어떤 상황 속에 넣는다. 그들이 영원히 그림 속에 갇혀있기를 희망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의 기억에서 캔버스로 옮겨가는 과정 동안의 치유 행위라고 짐작할 수 있다. 
몇몇 작업에서 붉은 콘 모양의 교통안전시설물이 여러 화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전체적인 분위기와 사뭇 다른 붉은 색이 시선을 잡아끌고 있으며, 주위를 환기시키고 있다. 이는 불안한 공기 속으로 영원히 잠식되지 않게 하는 경계등과 같은 효과로서 존재하듯 보인다. 이 우울한 기간 동안 스스로를 지탱하게 하는 어떤 의식을 끝까지 부여잡고 있었던 덕에 불행의 끝으로 빠지지 않았던 것 같아서 왠지 이 붉은 색 콘을 바라보면 위안이 된다. 또한 작가는 <모호하고 이중적인 공간>, 2011 에서 보여주고 있는 검은 봉지들을 자신의 불안한 감정을 봉인하고자 하는 의지의 상징으로서의 풍경을 보여준다. 이 검은 쓰레기 봉지는 점차 뭉게뭉게 피어나는 연기나 가벼운 솜처럼 표현되는데(<최소한의 풍경>, <요람>, 2012), 이러한 변화로 인해서 작가의 감정 변화가 감지되기에 다시 한 번 우리를 안도하게 한다. 그리고 점점 작가의 시선은 주변의 풍경으로 향한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잡혀있는 눈은 이제 조금 더 밖으로 나오게 되는데 여전히 완전한 시선을 두지는 못하고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아직 구체적인 형태가 없다.(<창>, <창2> 2012) 이후 그려진 시원하게 펼쳐진 남산을 바라보는 풍경도 한 개 속에 잠겨있는 듯 희미하고 몽롱하다.(<서늘한 풍경>, 2013) 
노경화는 아직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불안해한다. 작가의 심리적 변화가 명확히 보이는 중요한 부분은 그림의 내용 뿐 아니라 색채이다. 2011년에 무작위로 자신의 불안증을 기억나는 대로 혹은 상상하는 대로 그려내는 화면은 매우 구체성이 있으면서도 묘사된 대상의 색을 섬뜩하리만큼 창백하게 표현한다. 전체적으로 푸른색조이나 회색 톤에 가까워 작가의 절망감을 보다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2012년에 사용되는 푸른색은 가볍고 부드러운 파스텔 톤에 가깝다. 우울한 회색 톤은 거의 빠져나가고 있으며 대상의 표현은 모호해지고 있다. 점차 현실의 풍경을 묘사하려 하며 그것의 묘사는 초반 작업보다 훨씬 힘이 빠져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좀처럼 풍경 속에 넣지 않았던 초록색이 드러나는 것이다. 더불어 붉은 기운도 점차 들어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직은 희미한 톤이지만 2013년에 그려진 <서늘한 풍경>의 하늘에는 불그스름한 기운이 스며 나오고 있다. 

<보이지 않는 풍경>이라는 제목에서 우리는 ‘보다’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영어에서는 이 의미의 단어가 see, look, watch 등 다양한 표현으로 세분화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냥 눈을 어느 지점에 두는 행위, 자세히 들여다보는 행위, 무언가를 알고 이해하는 태도 등 어떤 태도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그 사용도 다르게 쓰인다. 이 전시의 제목은 ‘보다’라는 것이 문장에 따라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한국어의 특성을 잘 음미해야 할 것 같다. ‘보이지 않다’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눈앞의 것을 부정하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눈 앞의 것을 바라보되 그것에 대한 감정이 보는 이들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체화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신체의 망막을 통해 실제가 아닌 현상을 보고 있으며 현상이 스스로를 반영한다는 오래된 철학의 실천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눈앞의 풍경 속에서 자신이 바라보는 실제를 찾는 작업을 해 왔고 이에 대해 꾸준히 지속해 나가려는 듯하다. 김혜나는 자신의 시야에서 객관화된 풍경을 완전히 지워나갈 때 까지, 노경화는 자신 속에서 울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을 완전히 어루만질 때 까지. 그러고 나면 그 실체가 궁금해지는 또 다른 풍경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 기대한다. 

 

 

 

 

2013_보이지 않는 풍경_신한갤러리 역삼 도록.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