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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기 된 마음, 반죽 된 세계

노경화 개인전

공간 루트(서울 은평구 연서로26길 19)

2023.12.14-2023.12.27

14:00-20:00(월요일 휴관)

 

 작품을 제작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고자 하는 의지이며, 세계에 또 다른 세계를 덧대어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열망이다. 나에게 있어 이 과정은 의지와 열망이 조산 운동처럼 불-룩-, 내면 공간에서 융기 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솟아오른 의지와 열망 위에서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세계를 반죽한다. 그래서 나의 작업에는 앞이 뒤가 되기도, 뒤가 앞이 되기도 하는 식으로 많은 요소가 중첩된다. 나는 이따금 나의 작업들이 이런 반죽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거대한 반죽을 조금씩 잘라 세상에 내어 보인다.

 시간에 따라 사람은 변하고 작업도 변한다. 나의 최근 생각거리는 ‘매 순간의 나는 과연 연속성을 지니고 있었는가?’ 였다. 가끔은 어딘가 분절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으나 틀림없이 꾸준히 이어져 온 것은 마음을 내는 행위였고, 나는 언제나 세계를 반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전시에서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 그리고 동시에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연속성이다. 몇 년 간의 작업을 펼쳐내어 공간 속에서 유기적으로 생동하는 광경을 보여주고, 보려 한다. 마치 반죽 속 글루텐의 연결처럼. ●노경화

 

 

 

[노경화의 다정한 열망으로부터]
다양한 형태와 길이의 폭력에 대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여러 갈래에서 예술가들이
작품을 통해 사회에 증명하는 과정과 출발선은 바로 그것으로부터 커다란 맥을 지니기도
한다.
’폭력‘이라는 공포를 떨쳐냄은 물론 상처의 트라우마를 유연히 이겨내는 과정에 더불어,
어떻게 빛과 소금으로 존재하며. 거듭 가능성을 발현하고 앞으로 나아가 근두운처럼 시간의
흐름을 자유로이 타, 뒤 돌아 보았을때 만족스런 월계관을 지닐 수 있는가 이다.
그리하여 거창하고 긴 말보다도 화가가 던지는 화두에는 시간과 경험이 녹아있다. 자신의
부족했던 날도 자신이 변화하는 날도 모두 색과 선과 화폭에 진솔하게 담겨진다. 또
진솔이라는 퓨어함은 통하고 흐르고 다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함에있어 큰 힘이 있기에 더욱
우리에게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노경화 작가의 이번전시관련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10년간 작가로써 자신에 대한 관조를
어느정도 깊이 하였는가, 삶의 추구하는 바와 자신의 길을 나아가고 있는 더도 덜도아닌
작가의 나이에 알맞게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정리하였음을 느낄 수 있다.
작가의 작품은 계속 삶을 반영한다. 고정되어 있지만 살아 움직인다. 이번 전시에는
작품/작가노트/전시공간/전시서문/기획자가 작가를 통해 대중에게 작품을 세상에 드러내는
방법이 반죽되어 있다. 이 모든 마음과 다정함이 모여 우리는 이들을 노출하고 환기하며, 그
에너지가 바라보는 이들의 내면에 충분히 내려앉길.
노경화 작가의 전시를 함께 기획한 큐레이터 또한 다정한 마음으로 반죽되어 평형 혹은
평화의 유지에 원형을 이루고자한다. [소유안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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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기(隆起)
육지에 커다란 빙하가 있을 때 온도가 올라가면 빙하는 모두 녹아버린다. 녹아버린 빙하
때문에 그 지역의 밀도는 낮아지게 되고 밀도가 낮아지면 평형을 맞추기 위해 그 지역은
융기하게 된다.
uplift
명사- (위로) 올리기, 증가
명사- 희망, 행복감

 

 

 

 

 

이번 전시에 관한 의식의 흐름을 적은 글

 올해로 나는 10년 정도 활동한 작가가 되었다. 10년 간 나의 작품은 변화를 거듭해오다가 처음의 그것과 현재의 그것은 극단적으로 다른 양상을 띄게 되었다. 물론 혹자는 현재의 나의 작품이 비뚤어진 동심 같다고도 이야기를 한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맞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과거의 나는 삶은 苦이며 세상은 부조리로 충만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때의 작업은 그러한 나의 생각이 반영되었다. 바닥을 치면 튀어 오른다고. 심신의 질병과 가난함, 주변인들의 죽음을 겪고 나니 오히려 이제는 반대 방향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정제하여 말한다면, 모든 일에는 반드시 반대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종이의 앞 뒷면,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멀리서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다. 어떠한 상황, 어떠한 기분은 ‘나’가 아니며 그저 지금 이 순간을 통과하는 현상일 뿐이다. 나는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흘려보낼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선택할 것이며, 어떠한 그림을 그려 나갈 것인가? 이것이 몇 해 전 내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여전히 세상에는 부조리한 일들이 연일 벌어지지만 과연 그러한 상태만 현실에 흘러 넘치는 것일까? 생각의 방향을 바꾸니 사람들의 다정한 행동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우리 종이 다른 인간 종과 달리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다정함에 기반한 갖가지 협력으로 인한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의 미래 또한 그러한 마음과 행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전시에는 최근 3년 내의 작품을 주로 하여 소개한다. 나는 나의 작업이 꽤나 극단적으로 변화하였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지난 10여 년의 작업 중 상당 부분은 함께 전시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왔다. 모든 창작자가 그렇듯 시일이 한참 지난 작품이 작업실에 빛을 보지 못 한 채로 쌓여 있는 것은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불과 몇 달 전까지도 나는 지난 작업들이 접점이 없어서 노년이 되어서야 다시 공개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품의 파일을 정리하던 차에 과거의 어떤 작품들은 현재의 작업과 옛 작업을 잇는 교량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주관적인 생각이라 다른 이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과거의 작품과 현재의 작품을 함께 전시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에 이번 전시를 만나게 된 것이다. 물론 최근의 작품들이 전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겠지만, 징검다리와도 같은 과거의 작업이 함께 걸린다면 현재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관람자 뿐만 아니라 창작자인 나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경험이 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도 나는 전시의 제목을 생각하는 중이다. 언제나 제목을 정하는 일은 광활한 사막에서 아득히 멀리 떠있는 별을 보고 방향을 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북극성을 향해 갈 것인지, 베텔게우스를 향해 갈 것인지 아직 정하지 못 한 것이다. 전시의 제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때에 즉각적으로 떠오른 이미지는 반죽 같은 모습이었다. 나의 작업 여정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어서 먼 미래에는 어떤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을지 도무지 상상이 안 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언제나 이 여정은 반죽 같은 상태 같기도 하다. 전시 제목이 <반죽>이면 좀 웃길까 하는 생각도 든다. 생각해보니 나는 옛날부터 반죽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 만약 시간이 멈춘다면 이 순간이 찰진 반죽처럼 주욱 늘어지지 않을까 하는 공상을 하고는 했다. 찰진 반죽이라. 주욱 늘어진 찰진 반죽은 연속적인 것처럼 느껴 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내가 왜 반죽을 떠올렸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지난 작업부터 현재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나는 불연속적인, 다시 말해 단절된 부분이 있다고 착각해왔다. 그러나 결국 저 지점부터 이 지점까지 교량처럼, 끈적이는 글루텐처럼 이어주는 작품들이 있었다는 것 때문에 반죽이 생각난 것 같다. 웃기게도 지금 이 순간 <십년 동안의 반죽>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아마도 과거에 끝내 완독하지 못 한 <백년 동안의 고독>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생각을 이어가 본다. 굳이 반죽이라는 말을 넣을 필요는 없다.

-침묵.-

정신 집중 끝에 떠오른 <융기된 마음, 반죽된 세계>가 일단 제일 마음에 들었다. 수능 금지곡처럼 계속 떠오르는 반죽이라는 말에 갇혀서 어쩔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노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