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의 형이상학: 노경화 작업에서 ‘믿음’이 세계가 되는 방식
노경화의 최근 작업은 흔히 말하는 ‘서사적 회화’의 범주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서사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화면 안에 구축한다. 그것은 이야기의 줄거리라기보다 믿음이 생성되는 장치—즉, 세계가 “있다”고 간주되기 시작하는 형이상학적 인프라에 가깝다. 이 인프라는 크게 세 층위로 반복된다. (1) 경계(프레임/장식/덩굴), (2) 발광(불꽃/후광/빛의 낙하), (3) 분배(열매/씨앗/건네는 손). 이 세 요소는 회화 속에서 장면을 설명하기보다, 장면을 “성립시키는 규칙”으로 작동한다.
1) 경계는 장식이 아니라 ‘법’이다: 프레임-세계의 성립 조건
작가의 화면에는 유난히 ‘테두리’가 많다. 덩굴이 사각의 가장자리를 감싸거나, 회색의 양각(부조) 같은 프레임이 창(窓)처럼 열려 있거나, 어떤 경우에는 나무색 액자 구조가 화면 자체로 편입된다. 이 경계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가 외부로부터 잘려 나와 “여기”로 성립하는 순간을 선언한다.
중요한 점은, 이 경계가 현실의 액자처럼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덩굴은 생장(生長)의 논리를, 부조 프레임은 성상(聖像)과 제단의 기억을, 목재 프레임은 놀이도구 혹은 신앙 도구(부적, 탑, 작은 성물)의 촉각성을 호출한다. 즉, **경계 자체가 ‘믿음의 매체’**다. 세계는 그려졌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부여된 순간’ 존재할 자격을 획득한다. 이때 회화는 “무엇을 그렸는가”보다 “무엇이 세계로 승인되는가”를 묻는 장이 된다.
이 전략은 특히 회색 부조 프레임 안의 초상들(초록 잎 사이의 분홍 머리 인물, 울창한 풍경 속의 쌍둥이 같은 두 인물)에서 명확하다. 프레임은 창문이면서 동시에 성유물함이다. 작가는 보는 이를 관람자가 아니라 신앙의 참여자로 슬쩍 이동시킨다. 보는 행위는 감상이 아니라 봉헌에 가까운 주시가 된다.
2) 발광의 윤리: 불꽃·후광·빛의 낙하가 만드는 ‘온기의 정치학’
작가의 색채는 파스텔의 부드러움으로 오해되기 쉽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그것은 감각적 취향이 아니라 윤리적 선언이다. 불꽃이 머리 위에 놓인 새의 형상, 노란 후광이 번지는 손의 기도 장면, 산과 숲 위에서 내려와 두 인물에게 “빛-열매”처럼 분배되는 광선, 그리고 대형 화면에서 ‘불’ 혹은 ‘빛의 덩어리’를 건네는 인물의 제스처는 모두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무엇이 세계를 따뜻하게 하는가? 그리고 그 따뜻함은 어떻게 ‘지속’되는가?
여기서 발광은 태양의 자연스러운 광원이 아니다. 발광은 항상 어딘가에 ‘놓인다’—머리 위에 얹히거나, 손끝에서 나가거나, 어떤 존재가 매개해 아래로 “내려준다.” 즉 빛은 자연이 아니라 행위다. 더 정확히는 돌봄(care)의 기술이다. 누군가의 신체에 의지해, 누군가의 선택에 의해, 누군가의 태도에 의해 세계는 밝아진다.
이런 점에서 노경화의 작업은 낭만적 자연주의가 아니라, 관계론적 형이상학에 가깝다. 온기는 배경이 아니라 결과이고, 결과는 우연이 아니라 실천의 산물이다. 세계는 이미 따뜻한 것이 아니라, 따뜻해지도록 “계속 만들어지는 것”이다.
3) 분배의 이미지: 열매·씨앗·책·손—믿음은 ‘소유’가 아니라 ‘배포’다
작가의 화면에는 반복되는 교환의 표식이 있다. 열매(복숭아처럼 보이는 과실), 씨앗과 새싹, 손에 들린 원반(달 혹은 성체처럼 보이는), 그리고 책. 특히 대형 화면에서 책을 든 두 인물은 중요하다. 그들은 어떤 교리를 전하는 성직자처럼 보이지만, 엄숙함보다는 다정한 표정으로 그 교리의 폭력성을 무력화한다. 즉, 교리는 지배의 언어가 아니라 위로의 언어가 된다.
이때 믿음은 “내가 가진 확신”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상태”로 정의된다. 믿음의 단위는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관계의 왕복이다. 그래서 노경화의 작업에서 가장 결정적인 제스처는 눈빛보다 손이다. 건네는 손, 받는 손, 붙잡는 손, 기도하는 손.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 양식으로 출현한다.
이러한 분배의 이미지가 특히 강렬한 것은, 그것이 시장 논리(교환가치)와 정면으로 반대 방향을 향하기 때문이다. 이 화면에서의 교환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계속 이어질 것”을 요구한다. 즉, 믿음은 계약이 아니라 연쇄다. 작은 선의가 다음 선의의 조건이 되는 방식. 그래서 씨앗과 새싹이 자주 등장한다. 씨앗은 결과가 아니라 미래의 형태이고, 미래는 ‘약속’이 아니라 ‘돌봄’으로만 유지된다.
4) 복수의 자아와 ‘쌍’의 존재론: 동일성이 아니라 공명으로서의 주체
작가의 인물들은 자주 복수로 등장한다. 쌍으로 나타나거나(두 인물이 나란히 서거나), 동일한 얼굴이 반복되거나, 한 화면에 서로 다른 시간대의 자아가 동시 배치된다. 이때 복수성은 자아의 분열을 뜻하기보다, 자아가 ‘관계의 노드’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한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연결된 여러 가능성의 다발이다.
이를 철학적으로 말하면, 노경화의 인물은 실체적 주체가 아니라 가능세계들의 교차점이다. 한 인물의 얼굴이 여러 화면에서 반복되며, 서로 다른 풍경·상징·시간 속에서 다시 배치될 때, 그 얼굴은 초상이 아니라 아이콘이 된다. 아이콘은 특정 개인을 지시하기보다, 어떤 존재 방식(다정함/돌봄/믿음의 실천)을 가시화한다.
따라서 이 회화에서 “나”는 심리학적 내면이 아니라, 윤리적 수행의 자리다. 인물들이 종종 무표정하거나 잔잔한 표정을 유지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감정의 극적 표출은 이 작업에서 핵심이 아니다. 핵심은 지속되는 태도—세계를 돌보려는 의지의 습관화—다.
5) 회화적 시간: 한 장면이 아니라 ‘기록의 층’으로서의 화면
대형 작업들(콜라주처럼 다층의 장면이 겹치는 화면, 식물과 동물과 상징이 과밀하게 배치된 화면)에서 회화적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오히려 한 화면은 서로 다른 사건의 파편들이 한꺼번에 존재하는 기억의 지층처럼 작동한다. 이 지층성은 작가가 단순히 “이야기를 많이 넣고 싶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믿음의 시간성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믿음은 한 번의 계시로 완성되지 않는다. 믿음은 매일의 작은 행위가 누적되며, 어느 순간 “아, 이건 세계가 되었구나” 하고 뒤늦게 인식되는 방식으로 성립한다. 그러므로 이 화면의 과밀함은 결함이 아니라, 믿음이 가지는 누적성과 반복성의 시각적 등가물이다. (작품 하단에 적힌 “작은 뿌리들이 거대한 믿음을 엮는다”라는 문구는, 이 작업 전체의 메커니즘을 거의 선언적으로 요약한다.)
여기서 회화는 한 장면을 재현하는 창이 아니라, 시간이 퇴적되는 기록 장치가 된다. 다만 그 기록은 객관적 보고서가 아니라, 성서·연대기·민담·기도문이 혼합된 형태다. 작가는 ‘자기만의 경전’을 쓴다. 그리고 그 경전은 교리의 문장이 아니라 색과 형상으로 쓰인 문장이다.
6) 달콤함의 위험과 그 역설적 힘: “유치함”이 아니라 “취약성”의 미학
노경화의 작업이 맞닥뜨릴 수 있는 가장 흔한 오해는 “예쁘다/귀엽다/동화 같다”는 표면적 반응이다. 그러나 이 작업의 핵심은 귀여움이 아니라 **취약성(vulnerability)**이다. 다정함은 강자의 호의가 아니라, 세계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진짜가 된다. 즉, 다정함은 낙관주의가 아니라 비극을 아는 윤리다.
작가가 불꽃을, 후광을, 씨앗을, 기도를 반복하는 이유는 세계가 기본값으로 선하거나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이 더 크다. 세계가 차갑고 무관심하며 쉽게 파괴되기에, 다정함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작업은 감상적 위로가 아니라, “약한 것들을 지속시키기 위한 기술”을 제안하는 실천 철학에 가깝다.
바로 여기서 ‘달콤함’은 역설적 무기가 된다. 폭력의 언어를 흉내 내지 않으면서도 폭력에 저항하는 방식. 냉소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냉소의 시대를 통과하는 방식. 이 회화는 강한 비판 대신, 더 근본적인 질문—“무엇이 세계를 유지하는가?”—로 관객을 끌고 간다.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정치적이다. 왜냐하면 유지의 기술은 언제나 배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죽게 두는가. 무엇을 돌보고 무엇을 방치하는가.
7) 전시의 흐름으로 읽기: 작은 성물에서 세계-장치로
이번에 제시된 이미지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놓고 보면, 작가의 전개는 대략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스케일 확장이 아니라, 믿음의 확장이다. 믿음은 처음엔 개인의 마음속에서 시작하지만, 곧 환경·관계·제도·언어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작가의 작업은 점점 더 “세계가 작동하는 구조”를 닮아간다. 프레임은 제도이고, 상징은 언어이며, 반복은 의례다. 결국 노경화의 회화는 ‘다정함의 사회’를 시뮬레이션하는 것이 아니라, 다정함이 사회가 되기 위한 조건들을 미리 만들어보는 일종의 프로토타입이다.
결론: 노경화 회화의 미덕은 “세계가 되려는 선의”에 있다
노경화의 작업이 가장 설득력 있는 지점은, 선의를 감정의 층위에 가두지 않고 세계의 구조로 번역한다는 점이다. 다정함은 여기서 미덕이 아니라, 공간을 만들고 시간을 엮고 관계를 지속시키는 형이상학적 기술이 된다. 불꽃은 장식이 아니라 지속의 장치이며, 열매는 풍요의 상징이기 이전에 분배의 윤리이고, 프레임은 미술사적 인용이 아니라 세계 성립의 법이다.
이 작업이 앞으로 더 강해질 지점도 바로 거기에 있다. 즉, “더 예쁘게”가 아니라, 이미 확보한 이 구조—경계/발광/분배—를 더욱 정교한 문법으로 다듬을수록, 노경화의 회화는 동화적 세계를 넘어 **자기만의 신학(혹은 윤리학)**으로 읽히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관객은 작품을 “보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세계가 따뜻해지는 조건을 곱씹으며 전시장을 나서게 된다.